[배터리를 찾아서] 5편
소재 산업의 큰 그림 — 철강과 석유화학
AI Written
배를 만드는 후판, 자동차 차체, 냉장고 겉판, 그리고 우리가 매일 쓰는 플라스틱 컵과 옷의 합성섬유. 이것들은 모두 두 가지 소재 산업에서 시작한다. 쇳물을 만드는 철강, 그리고 나프타에서 플라스틱 원료를 뽑는 석유화학이다. 둘 다 한국 경제를 수십 년 동안 받쳐 온 산업인데, 지금은 중국의 대규모 증설과 탄소 규제라는 두 벽 앞에 서 있다. 소재 산업의 큰 그림을 그려 보자.
5-1. 모든 산업의 밑바닥
소재 산업은 다른 산업이 쓰는 '재료'를 만드는 산업이다. 철강은 조선·자동차·건설·가전의 뼈대가 되고, 석유화학은 플라스틱·합성섬유·합성고무를 거쳐 거의 모든 제품에 들어간다. 그래서 소재 산업의 실적은 그 재료를 쓰는 산업들의 경기를 그대로 따라간다. 배가 많이 지어지면 후판이, 차가 많이 팔리면 강판과 플라스틱이 더 팔린다.
그리고 두 산업 모두 장치 산업이다. 거대한 설비를 한 번 지으면 24시간 쉬지 않고 돌려야 이익이 난다. 설비를 껐다 켜는 것만으로도 큰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요가 줄어도 생산을 쉽게 줄이지 못하고, 남는 물건은 싼값에라도 팔게 된다. 이 특성이 지금 중국발 공급 과잉 문제의 뿌리다.
5-2. 쇳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철강의 출발점은 고로(용광로)다. 높이 100m 안팎의 거대한 탑 위에서 철광석과 석탄을 구워 만든 코크스를 넣고, 아래에서 뜨거운 바람을 불어 넣는다. 코크스가 타면서 철광석에서 산소를 떼어 내면 녹은 쇠, 즉 쇳물이 바닥으로 흘러나온다. 이 쇳물에서 불순물을 빼고 성분을 맞춰 강철을 만든 뒤, 눌러 펴서 열연·냉연 강판이나 조선용 후판으로 만든다.
다른 방법도 있다. 전기로는 고철(쓰고 버린 철)을 전기로 녹여 다시 강철로 만든다. 철광석과 석탄을 쓰지 않으니 탄소 배출이 훨씬 적지만, 고철의 품질에 따라 만들 수 있는 제품이 제한된다.
한국 철강의 상징은 포스코다. 1968년 정부 주도로 세워졌고, 일본에서 받은 청구권 자금 일부를 들여 지은 포항제철소에서 1973년 첫 쇳물을 뽑았다. 이후 전남 광양에 두 번째 제철소를 지어 세계적인 철강 회사가 됐다. 현대자동차그룹의 현대제철은 당진에 고로를 지어 자동차 강판을 직접 만든다. 조선·해운에서 본 정주영의 조선소가 포스코의 첫 큰 고객 중 하나였다. 연결: 조선·해운.

5-3. 세계 철강의 절반은 중국
세계철강협회에 따르면 2024년 세계 조강(쇳물을 굳혀 만든 기초 강철) 생산은 약 18억 8천만 톤이었고, 그중 중국이 약 10억 톤으로 절반이 넘었다. 2위 인도는 1억 5천만 톤 안팎, 한국은 약 6,300만 톤으로 세계 6위권이다(대략치) [확인 필요: 순위].
중국 철강은 지난 20여 년 동안 중국의 건설 붐과 함께 컸다. 아파트와 도로, 다리를 짓는 데 엄청난 철이 들어갔다. 그런데 2020년대 들어 중국 부동산 시장이 무너지면서 국내 수요가 줄었다. 5-1에서 본 대로 철강 공장은 쉽게 멈출 수 없으니, 남는 철강이 싼값에 해외로 쏟아졌다. 그 결과 세계 철강값이 떨어지고, 한국 철강 회사들의 이익도 크게 줄었다.

각국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미국은 수입 철강에 높은 관세를 매기고 2025년 그 세율을 더 올렸고 [확인 필요: 세율과 시점], 한국도 중국산 후판 등에 반덤핑 관세를 매겼다. 조선·해운에서 본 '조선소는 싼 후판을 원하고 철강 회사는 비싸게 팔고 싶은' 갈등이 이 대목에서 다시 나온다. 연결: 경제·시장, 세계·지정학.
5-4. 탄소라는 새 벽
철강의 또 다른 숙제는 탄소다. 고로는 석탄으로 철광석의 산소를 떼어 내는 방식이라, 쇳물 1톤을 만들 때 이산화탄소가 약 2톤 나온다(대략치). 그래서 철강은 한국에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내뿜는 산업 중 하나이고, 포스코는 한국에서 단일 기업으로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회사다 [확인 필요].
유럽연합은 수입품에 들어간 탄소만큼 비용을 물리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도입해, 2026년부터 본격적으로 돈을 걷기 시작한다 [확인 필요: 시행 일정]. 탄소를 많이 내뿜고 만든 철강일수록 유럽에 팔 때 더 비싸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철강 회사들이 내놓은 답이 수소환원제철이다. 석탄 대신 수소로 철광석의 산소를 떼어 내면 이산화탄소 대신 물이 나온다. 포스코는 '하이렉스(HyREX)'라는 자체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문제는 깨끗한 수소를 엄청나게 많이, 싸게 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철강의 미래는 전력·에너지 산업과 묶여 있다. 연결: 전력·에너지.
5-5. 석유화학 — 나프타에서 플라스틱까지
이제 두 번째 소재 산업, 석유화학이다. 원유를 정유 공장에서 끓여 나누면 휘발유, 경유와 함께 나프타라는 액체가 나온다. 이 나프타를 아주 높은 온도로 쪼개는 설비가 NCC(Naphtha Cracking Center, 나프타 분해 설비)다. 나프타가 쪼개지면 에틸렌, 프로필렌 같은 기초 원료가 나오고, 이것을 이어 붙이면 폴리에틸렌(비닐봉지), 폴리프로필렌(플라스틱 용기), 합성섬유, 합성고무가 된다.

에틸렌은 '석유화학의 쌀'이라고 불린다. 거의 모든 플라스틱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울산, 여수, 충남 대산의 3대 석유화학 단지에 NCC를 모아 두고, LG화학,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SK, GS 계열사 등이 에틸렌을 만든다. 한국의 에틸렌 생산 능력은 세계 상위권이다 [확인 필요: 순위].
석유화학 회사의 이익은 '제품값에서 원료값을 뺀 차이(스프레드)'로 정해진다. 플라스틱값이 그대로인데 원유·나프타값이 오르면 이익이 줄고, 반대면 는다. 그래서 석유화학은 유가와 중국 경기에 함께 흔들린다. 연결: 전력·에너지(석유).
5-6. 중국 증설이 바꾼 판
한국 석유화학은 오랫동안 중국에 기대어 컸다. 중국 공장들이 쓰는 플라스틱 원료를 한국이 만들어 팔았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부터 중국이 자국에 NCC를 대거 지으면서 판이 뒤집혔다. 중국은 이제 플라스틱 원료를 거의 자급하고, 남는 것은 해외로 판다. 중동 산유국들도 값싼 원유를 바탕으로 큰 설비를 지었다.
한국의 가장 큰 고객이 경쟁자가 된 것이다. 2022년 이후 한국 석유화학 회사들은 대규모 적자를 냈고, 일부 공장은 멈췄다. 결국 2025년 정부와 업계는 NCC 설비를 크게 줄이는 구조조정에 나섰다. 에틸렌 생산 능력을 최대 수백만 톤 줄이고, 같은 단지 안의 회사들끼리 설비를 합치는 방안이다 [확인 필요: 감축 규모와 회사별 계획]. 조선·해운에서 본 2010년대 조선 구조조정과 닮은 장면이다. 연결: 조선·해운, 정치·사회.
5-7. 힘의 논리 — 범용과 스페셜티
철강과 석유화학의 이야기를 겹쳐 보면 같은 결론이 나온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범용 제품은 규모가 가장 큰 쪽이 이긴다. 그리고 지금 규모가 가장 큰 쪽은 중국이다. 한국이 같은 제품으로 중국과 싸우면 이기기 어렵다.
그래서 한국 소재 회사들은 아무나 못 만드는 스페셜티(고부가 제품)로 옮겨 가고 있다. 철강에서는 자동차용 고강도 강판, LNG선용 특수강, 그리고 탄소를 덜 내뿜는 철강이다. 석유화학에서는 반도체 소재와 배터리 소재다. 이 시리즈 앞부분에서 본 포스코퓨처엠의 양극재·음극재, LG화학의 양극재가 바로 그 결과다. 철강 회사와 화학 회사가 배터리 소재 회사가 된 이유가 여기 있다. 연결: 반도체.
핵심 정리
철강과 석유화학은 거의 모든 산업에 재료를 대는 장치 산업이다. 중국이 세계 철강의 절반을 만들고 석유화학 원료까지 자급하면서, 남는 물량이 세계로 쏟아져 한국 회사들의 이익을 깎았다. 여기에 탄소 규제라는 새 벽이 생겼다. 한국 소재 회사들은 수소환원제철, 설비 구조조정, 그리고 배터리·반도체 같은 고부가 소재로의 전환으로 답을 찾고 있다.
여기까지가 배터리·소재의 기초다. 다음부터는 지금 판을 흔드는 이슈로 들어간다. 전기차가 주춤하는 사이, 배터리 회사들은 왜 ESS로 몰려가고 있을까?
다음 이야기 예고 — 전기차 캐즘과 ESS로의 방향 전환
전기차 판매가 왜 기대만큼 늘지 않는지, 배터리 회사들이 ESS에서 무엇을 노리는지, 그리고 그 흐름이 한국 배터리 산업에 어떤 의미인지 따라간다.
사진 출처
- 포스코 포항제철소: Aatu Dorochenko, CC BY-SA 4.0 (위키미디어)
- 중국 랴오닝성 번시의 제철소 고로: Andreas Habich, CC BY-SA 3.0 (위키미디어)
- 독일 루트비히스하펜 BASF의 스팀 크래커: Rolf Kickuth, CC BY-SA 4.0 (위키미디어)
숫자 출처
- 2024년 세계·국가별 조강 생산량: 세계철강협회(worldsteel), https://worldsteel.org/data/world-steel-in-figures-2025/ [확인 필요: 링크와 수치]
- 포스코 설립(1968년)과 포항 첫 쇳물(1973년): https://en.wikipedia.org/wiki/POSCO
- 쇳물 1톤당 이산화탄소 배출량, 한국 에틸렌 생산 능력 순위, 석유화학 구조조정 규모, 미국 철강 관세율, EU CBAM 일정: 대략치. 정부·업계 발표로 확인 필요.